Be nice to everyone ;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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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남않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빠 2022. 9. 8. 00:30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게 아닌 싫어하는 것들을 피해 가는 선택만 해왔다.
국어가 싫어서 이과를 선택했고,
남들은 각자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분야로 대입을 결정하고 노력할 때
나는 그저 이과에서 취업이 잘된다는 공대를 선택했다. 공대 중에서도 전자가 싫어 기계공학과를 선택했다.

대학가서는 힘들고 버거웠던 과목들은 어영부영해내서 어떻게든 점수를 받고, 그나마 괜찮았던 과목들을 높은 점수를 받아내어 학점을 간신히 유지했다. 전공 경로를 선택할 때는 하던 거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전공심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결국엔, 싫어하는 것들을 피해서 선택하다 보니 결국엔 싫어하는 것들만 남게 될 것이다.
내가 회피했던 것들은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날아오게 되고,
그동안 했던 선택들은 하나의 길이 되었지만 목적지도 모르고 맞는 길을 선택했는지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그 속에서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더 나아가면 영원히 싫은 것만 하게 되며 살아갈 거라는 것이다.
우울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없으면 이렇게 어영부영 사는 건가 싶었다. 이런 일로 쉽게 우울해지진 않지만 왠지 공허하고 힘들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난 똑같이 선택했을걸 알기에 지나간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이따금씩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께 상담을 신청했다. 원래 학생 상담 의무가 없으신 분이지만 취업과 진로에 관련해 언제든 연락 주라고 하셨던 게 생각이 났었다. 사실 나아질 거라 기대를 안 했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답을 구할 수 있었다. 싫어하는 것들을 피해서 왔는데 결국은 싫어하는 걸 평생 하게 될 거라고 푸념인 듯 취업 고민인 듯 상담을 했는데 별 거 아닌 말들도 차분히 경청해주시고, 흘러갔던 말들도 다시 잡아 장점을 찾아주셨다. 싫어하는 것들만 피해 갔던 길 속에서 내가 선호했던 것을 캐치해주시고 그 분야의 현실적인 취업 방향과 잘하고 있다는 위로도 해주셔서 얼떨떨했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때까지 따뜻하고 세밀한 기술로 배려 해준 사람을 만났을 때 힘을 얻는다. -<말그릇> 중에서
오래전에 읽었던 책의 필사였는데 정말 와닿았다.

피하며 살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호하는 것들이 조금씩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랜만에 와닿는 조언이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런 사람들이 주위에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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